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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아델 블로흐 바우어 1세의 초상화
〈아델 블로흐 바우어 1세의 초상화〉 1907 뉴욕 노이어 갤러리

 

 클림트는 작품에 왜 황금색을 사용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의 화가 화려한 색감과 유려한 선 그리고 매혹적인 피사체. 19세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56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회화, 벽화, 스케치 등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도 또 그 이후 시대의 그림들과도 선명히 구분되며 자신만의 개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들은 특유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바우어의 초상>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다양한 대중매체와 산업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들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입니다.

 

그의 작품 속엔 황금색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클림트는 왜 작품 속에 황금색을 사용했을까요? 당시 클림트는 환의와 매혹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단순히 작품 속에 그러한 소재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감정이 느껴지길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작품 자체에 매혹되고 또 환희를 느끼길 바랐기 때문에 클림트는 그림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작품 자체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황금 금박을 활용해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클림트의 황금시대라 불렀습니다.

 

1907년 그려진 키스는 이러한 클림트의 고민이 담긴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키스하는 연인의 모습을 통해 클림트는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입맞춤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사랑의 기억은 마치 영원하게 이어질 것만 같습니다. 키스로부터 펼쳐지는 사랑의 고결함과 찬란함을 클림트는 황금을 통해 표현하려 했습니다.

 

 

 화려한 작품 속 삶의 순간순간을 담아내고자 했던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귀금속을 다루는 세공업자였습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클림트의 형제는 7명이나 됐습니다. 클림트는 그중 둘째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클림트는 아버지의 수공의 품을 보며 자랐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세세한 디테일 이는 어린 시절 클림트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예술가를 꿈꾸게 됩니다.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 재정적인 문제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지만 어릴 적부터 클림트의 재능을 알아본 친척의 도움으로 비엔나 국립응용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자 응용미술을 시작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모자이크 기법들을 익히며 클림트는 자신만의 장식 기법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던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친구와 함께 주로 벽화를 그리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클림트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10대 소년의 벽화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급기야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빈 역사박물관에 장식을 맡는 큰일을 해내기도 하며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에서 뛰어난 건축 장식가로 손꼽히게 됩니다.

 

1892년 성공 가도를 달리던 클림트의 삶에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몇 달 후 예술적 동지이자 동생이었던 에른스트가 독감으로 인해 세상을 떠납니다.

 

클림트는 한순간에 가장 가까웠던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깊은 상실감에 빠집니다. 이후 약 3년 동안 작품 활동을 접었습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클림트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클림트는 삶과 인간 내면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1895년이 되어서야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의 작품을 다시 작품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부터 클림트는 작품 속에 상징적인 요소들을 담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요소요소 안에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담았죠. 클림트는 예술을 통해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클림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은유의 이미지들이 자리 잡고 있죠. 사람들은 이 시기부터 클림트가 작품 속에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하는 상징주의를 받아들였다 평가합니다.

 

 클림트의 작품 "삶과 죽음"에 대하여 

구스타프 클림트&#44; 삶과 죽음
<삶과 죽음> 1916 개인소장

 

 

남색 빛을 띠는 어두운 회색 공간이 그림의 배경입니다. 우주처럼 깊어 보입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덩어리가 있습니다. 왼편 흐물거리는 막대 같은 것은 죽음입니다. 해골이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오른편에는 타원형으로 사람들이 뒤엉켜 빙글빙글 도는 듯이 보입니다. 끌어안고 있는 남녀가 보이고 위로는 할머니와 아기, 엄마, 소녀도 있습니다.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삶의 공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멀지 않은 곳에서 죽음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화가는 그 죽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화가가 작품을 그리던 1910년경, 오스트리아 빈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거대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종말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악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죽음이 생길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왼쪽 해골이 웃고 있습니다. 눈도 선해 보이고 위협하는 느낌도 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밝은 주홍빛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입은 옷도 음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식적이고 세련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 같아도 보입니다. 화가가 죽음을 어둡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른편 삶의 타원형의 사람들에게선 화려하고 밝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눈을 감았습니다. 왼편 위 한 소녀는 뜨고 있는데 꿈에 빠져 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들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어둡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상상하다 보면 영원히 순수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가 한 말입니다. 여러 평론가들은 이 작품은 엘리자베트 황후의 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음을 상상하다 보면 영원히 순수해진다는 이 작품은 1911년 로마 국제미술전시회에서 1등 상을 수상했으며, 화가의 이름은 구스타프 클림트입니다.

 

191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클림트는 이내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정신적 동반자이자 평생의 모델이었던 에밀리 플리게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뒀다 전해집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영원한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클림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즐기며 클림트가 담아냈던 감정과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을, 또 때로는 삶의 고뇌를, 화려한 작품 속 삶의 순간순간들을 영원하게 담아내고자 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100년 만에 돌아온 그의 작품에 대해 알아봐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잃어버린 걸작 100년만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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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제자 '에곤 실레'

 

트러블 메이커 에곤 실레 : 요절한 천재화가의 그로테스크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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