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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중심, 트러블 메이커 에곤 실레의 애증의 가족
1912년 오스트리아 촉망받던 한 화가가 법정에 섭니다. 그가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미성년자를 모델로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고 또 미성년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뒀다는 이유로 법정에 재판부는 일부 죄목은 혐의가 없다 판단했지만 일부는 인정하며 그에게 죄를 묻습니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짧은 징역을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에곤 실레(Egon Schiele)
뒤틀린 알몸과 불안한 눈빛 독특한 구도에 굵은 선과 음울한 색감으로 그려진 인물들. 마치 죽음과 쾌락의 경계에 선 듯 위태로워 보이고 에로틱하면서도 강렬한 에곤 실레만의 스타일은 그에게 명성과 함께 법정 구속이란 그림자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위태로운 모습의 인간을 평생에 걸쳐 그렸습니다. 애곤 실레는 왜 이렇게 위태로운 사람들을 그렸을까요? 에곤실레의 그림은 솔직합니다. 신화나 상상을 그린 고전 명화의 누드는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상적인 비율로 그려졌습니다.
그에 비해 에곤실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좀 다릅니다. 생기를 잃은 눈, 앙상한 몸까지 보편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물들이 꾸밈없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때론 화면 밖 인물을 응시하며 나른한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체모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죠.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불쾌하다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물의 균형을 잃은 몸과 눈빛은 불안정한 감정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에곤 실레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닙니다.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툴룬에서 태어난 에곤 실레는 역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자주 기차를 그리게 됩니다. 기차에 매료되었던 탓에 몇 시간씩 기차나 풍경을 그리곤 했습니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타고난 재능을 보였던 에곤 실레, 그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스케치북에 그려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1905년 15살의 에곤 실레는 아버지를 잃습니다. 생전에 성병과 정신병을 앓았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성병은 무척 흔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해체되는 걸 지켜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곤 실레의 삶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오스트리아 최고 미술학교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는 기대한 것과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를 내세우며 매우 보수적인 교육이 이어졌습니다. 입학 첫 3년 동안은 데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태, 비례, 구도와 같은 회화의 기초를 익히기엔 데생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에곤 실레는 색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학교의 교육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인재를 양성해 온 학교, 개성도 배우고 싶은 것도 명확했던 에곤 실리, 둘은 번번이 부딪힙니다.
특히 담당 교사와 큰 갈등을 겪습니다. 교사는 에곤 실레를 향해 악마가 들여보낸 사람이라며 자신의 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에곤 실레의 위대한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만남
에곤 실레에겐 좋은 만남도 찾아옵니다. 그의 삶을 뒤흔든 위대한 스승이자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에곤실레보다 30년이나 선배고 에로틱한 누드화로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크림트는 황금의 화가로 당시 미술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추구하는 분리파를 이끌며 에너지 넘치는 젊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둘은 서로의 그림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50살의 천재 화가가 20살의 천재 화가를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교수들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클림트의 생각에 학생들이 물들까 봐 걱정했습니다. 분리파에 연루되지 말라며 거듭해 말했고, 심지어 전시를 방문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학생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에곤 실레였습니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던 클림트. 그는 에곤 실레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사주고, 때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해 주며 재원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죠. 심지어 후원자까지 소개해 줍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에 1909년 에곤실레는 결국 아카데미를 그만둡니다.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모아 신 예술가 그룹을 결성합니다. 개성 있는 화풍을 고민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는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자는 클림트의 한마디가 마음을 맴돌았습니다.
자신의 화풍을 연구하기에 앞서 에곤 실레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회화의 진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에곤 실레는 많은 걸 고민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성에 대한 욕망, 인간의 실존 하나같이 어렵고 무거운 주제였죠. 에곤 실레는 이것들을 불안에 휩싸인 인간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진실과 본성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에곤 실레가 그림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였습니다.
인간이라면 성에 대한 욕망을 숨길 수 없고 다가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과 죽음이란 주제로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본능에 충실했던 천재화가의 죽음
그는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라 생각했습니다. 계속해 그림을 그리며 실력을 쌓은 에곤 실레 화가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으며 승승장구합니다. 특유의 스타일은 정점을 향해 갑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미술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전쟁 중에도 그림 작업을 계속합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날 무렵엔 각종 전시회에 참가하며 작가로서 분명한 입지를 다집니다. 재정적 사회적으로도 하나둘 안정을 찾아가던 와중에 아내의 임신 소식까지 전해지고 무척 행복했던 에곤 실레는 그림 하나를 그립니다.
바로 가족 맨 뒤에서 든든히 가족을 지키는 작가 본인과 사랑스러운 아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까지 이 그림에서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을 휩쓸고 간 무서운 전염병 스페인 독감이 그의 가족에게도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력한 전염병은 뱃속 아이는 물론이고 임신한 아내까지 모두 빼앗아갑니다. 정성껏 간호했지만 결국 가족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고 3일 후 에곤 실레 역시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고 28배 나이로 눈을 감고 맙니다.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걸작을 남긴 것은 특별합니다. 에곤실레가 특별히 천재성을 보인 것은 감정에 관한 부분입니다. 감정처럼 복잡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에곤실레는 자신이 그림 속에 온갖 감정들을 섞어 넣었습니다.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뜻입니다. 감정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는 작품은 대중을 감동시킵니다.
에곤 실레의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