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유화를 처음으로 발명한 '유화의 아버지' 얀 반 에이크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는 북부 르네상스 시대의 플랑드르 화가이며, 15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의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1395?년경 림부르크 지역의 마세이크 마을에서 태어난 얀 반 에이크의 초기 삶은 잘 알려진 게 없습니다.
단지 그의 형 휴베르트 반 에이크도 그와 같은 화가였고, 유화를 발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등에서 색채를 만들고 이를 가공하여 안료를 직접 마련하였으며 그것을 주로 계란에 섞어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계란에 섞은 물감은 빨리 마르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아이크 형제는 단점의 보완하기 위해 색채 가루에 최초로 기름을 섞어서 사용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유화를 처음 발명하고 뛰어난 유화 기법과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가장 유명합니다.
얀 반 에이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그의 형 휴베르트와 공동으로 제작한 기념비적인 제단화인 <어린양에 대한 경배>입니다. 제단화는 반 에이크 형제의 세심한 터치, 빛나는 색상, 획기적인 유화 기법 사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1432년경에 완성된 제단화는 북부 르네상스 예술의 걸작으로 남아 있으며 벨기에 겐트의 성 바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숨은 의미의 작품 <지오반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꼭 맞잡은 두 손, 엄숙한 표정, 화면 꽉 차게 서 있는 두 사람. 15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회화로 손꼽히는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입니다. 섬세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준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이 작품 뭔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위아래로 늘려놓은 듯한 인물의 모습,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이 그림은 여전히 다양한 소문을 몰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고, 그림 속 남자를 화려한 옷을 입은 푸틴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결혼을 하는 모습일 것이라 유추합니다.
실제로 이 그림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두 사람의 신발은 벗겨져 있습니다. 정중앙의 벽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평범한 결혼식 장면을 그렸다기에는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실제로 그림이 그려진 15세기는 그림에 상징을 넣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15세기 초 이탈리아 브뤼헤는 번성하던 경제 도시였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림 속에 숨겨놓은 퍼즐 조각 중 하나는 바로 아르놀피니의 부유함입니다. 당시의 침실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입은 옷을 살펴보면 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섬세하고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문 밖을 보면 붉은 열매들이 열려 있습니다. 열매가 맺힐 정도로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겨울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의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임신한 것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이 둥근 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복장이었습니다. 여성은 비싼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아주 길게 만들어 손으로 부여매고 다녔는데, 이는 자신의 부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이기도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창가 아래쪽에는 오렌지가 놓여 있습니다. 당시 브뤼헤에서 오렌지는 아주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수입해야 구할 수 있었던 값비싼 과일이 창틀과 서랍 위를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창문 위에 스테인드 글라스와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문양의 카펫은 흔히 구할 수 없는 것이었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자신의 집 창문에 넣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아마 아르놀피니 부부는 그 지역을 주름잡는 부자였을 겁니다.
질감 표현을 중시했던 얀 반 에이크는 고급 모피의 털부터 드레스에 미세한 절개선까지 그려냈습니다. 그의 섬세한 표현 방식은 곳곳의 부유함을 그려내기에 아주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새겨 넣은 것은 부유함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부부는 침실에서 신발을 벗고 있습니다. 남자의 나막신을 남자의 발 옆에, 여자의 붉은 신발은 뒤편에 붉은 소파 앞에 있습니다.
유럽 사회는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신성한 공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리의 개가 정면을 향해 서 있습니다.
개는 신뢰와 충실함을 상징합니다. 개를 확대해서 보면 얀 반에이크가 얼마나 섬세한 화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의 털 한 올 한 올을 모두 그려냈습니다. 그림의 어느 한 부분도 의미 없이 그리지 않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여인의 머리 근처에는 용을 밟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는데요. 출산의 수호신인 성녀 마르가르타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인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한 두 사람 사이의 샹들리에에는 단 한 개의 초만 켜져 있습니다. 기독교 사회였던 당시에 단 하나의 촛불은 '신의 눈'을 의미했습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은 신의 가 아래 이루어진 성스러운 서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서약에 증인으로 선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벽거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울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 번째로 거울은 뒤에서 보는 시선을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이 공간이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 거울이 없었다면 그저 두 부부가 서약을 하는 평면적인 그림이었을 겁니다. 두 번째로 거울은 그림 속에는 나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이 공간 안에 더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 두 사람이 이 서약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거울 위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 화가는 자신이 그 공간에 있었음을 직접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동시에 이 서약의 증인으로 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얀 반 에이크 옆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습니다. 그의 조수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순간 저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당신을 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이 부부는 가장 많은 하객을 가진 부부라 불리기도 합니다. 털 하나까지 표현한 사실적인 묘사에 평범한 그림을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거울까지 이 그림은 진짜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요소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현실감 대신 왠지 모를 기이함이 느껴집니다.
얀 반에이크는 빛을 잘 쓴 화가로도 불립니다. 창문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와 그들의 얼굴을 지나 뒤편에 유리, 목줄, 심지어 개의 눈동자에까지 저민 빛을 보면 그가 빛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빛을 잘 표현해 내기 위해선 색을 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빛에 비친 은은한 피부, 광채 나 창문 옆에 빛을 받고 있는 쨍한 오렌지의 색감들을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유화 물감을 아주 얇게 여러 번으로 칠해서 각각의 겹이 투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한 겹 위에 또 한 겹 칠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한 색채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는 여인이 쓰고 있는 레이스의 빳빳한 질감, 남자가 벗어놓은 남악신 뒤꿈치에 나무 질감까지 표현해 놨습니다.
그림에 숨겨진 비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아르놀피니 부부가 1447년에 결혼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그림이 그려지고 13년 후 작가가 사망한 지 6년 후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그림이 결혼식 당시의 그림이 아니라 약혼의 증명을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2천 년대 또 한 번 파장이 일어납니다. 사실 아르놀피니 가문에는 두 명의 지오반니 아르놀피니가 있었습니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촌 지간이었습니다.
만약 그림에 그려진 남자가 이미 알려진 아르놀피니가 아닌 사촌 아르놀피니라면 이 그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는 그림이 그려지기 1년 전에 죽었습니다.
이 초상이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한 초상화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샹들리에를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샹들리의 초는 단순히 하나가 아닙니다. 아래쪽의 초를 살펴보면 받침대 끝자락에 남은 촛농 자국이 흘러 있습니다.
사실 초는 2개였다가 그녀 쪽의 초가 모두 다 타버린 것이죠. 이는 그녀의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거울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을 두르고 있는 원형 장식에는 12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의 고난을 그린 장면입니다. 이 원형 무늬의 실제 크기는 손톱의 반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장면이 어떤 장면들인지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얀 반 에이크는 섬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아르놀피니가 있는 왼쪽 무늬에는 모두 예수의 삶에 대한 장면을, 부인이 있는 오른쪽 무늬에는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장면을 그려놓았습니다.
결혼의 신뢰를 나타내는 개 또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여성의 무덤에 개를 많이 조각해 두었습니다. 그림 속 강아지 또한 그녀를 향해 있습니다. 이후에도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수많은 가설이 만들어지며 풀리지 않은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이 작품 단 하나만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르놀피니 부부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회자되며 관심을 받습니다. 사실적인 표현과 비교되는 비현실적인 구도, 그리고 그 안에 풀리지 않은 상징들까지 서로 뒤섞여 기이한 느낌을 줍니다.
얀 반 에이크의 초상화?
그는 조화로운 구성에 극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인 표현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붉은 터번을 한 남자의 초상>에서도 얀 반 에이크의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입니다. 화가의 정확한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붉은 터번을 한 남자의 초상>이 화가의 또 다른 자화상이 아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추정 단서는 이 초상화의 위아래에 남긴 얀 반 에이크의 서명에 있습니다. 윗부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화가가 다른 작품에도 종종 사용한 적 있는 화가의 좌우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겸손과 자부심이 동시에 읽히는 구절입니다.
아래쪽에는 "얀 반 에이크가 1433년 10월 21일에 나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의 서명과 제작 시기를 밝힌 것으로 얀 반 에이크가 이 작품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이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추정되는 또 다른 단서는 인물의 시선입니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초상화 인물들은 대부분 몸을 그림 왼쪽으로 틀고 왼쪽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인물은 정면을 응시하며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어 존재감을 부각합니다.
눈동자는 옅은 푸른빛을 띠고 눈은 살짝 충혈된 듯이 보입니다.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지만 침착하고 고유한 가운데서 날카로운 눈빛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침착한 표정이 오히려 인물의 개성을 더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가 두르고 있는 붉은 터번은 사실 터번이 아니라 샤프롱에 더 가깝습니다. 샤프롱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두건인데, 이 남자는 두건을 내리지 않고 위로 접어 올려 터번처럼 만들었습니다.
남자의 피부는 나이 들어 거칠고 주름졌습니다. 턱에는 수염이 날 듯 말 듯합니다. 목은 부드러운 모피털이 감싸고 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화가의 자화상이 맞는다면 이 작품은 38살의 얀 반 에이크를 그린 것입니다. 섬세하고 세밀한 표현의 대가 15세기 북유럽 만의 사실주의 미술을 이끈 플랑드르 1세대 화가 얀 반 에이크입니다.
다른 르네상스 화가들은 누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