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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프라도미술관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30여 년을 보낸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는 1599년 스페인 세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1623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눈에 들어 24살의 나이에 궁정 화가의 지위에 오릅니다. 이후 30년 동안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수많은 왕실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특히 국왕인 펠리페 4세와 강한 친분을 쌓았습니다. 왕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큰아들 첫째 발타자르 카를로스왕자가 17세에 천연두로 죽자 그의 방을 벨라스케스의 화실로 내어줄 정도였습니다. 작품 <시녀들>의 배경이 되는 공간입니다.

 

그는 자신의 화실을 직접 고른 작품들로 채웠습니다. 루벤스의 <아라크네를 벌주는 팔라스 아테나>와 요르단스의 <아폴로와 판>이 걸려 있는데요. 이 작품들은 벨라스케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 그림은 모두 신에게 도전했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판은 음악의 신 아폴로와 연주 대결을 벌이고, 아라크네는 직조의 신 아테나와 직조 대결을 벌입니다.

 

17세기의 그림은 시나 음악처럼 예술로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화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신에게 도전하는 그림을 걸어놓고 캔버스 앞에 서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라는 듯 말입니다. 그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 같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국왕 펠리페 4세를 비롯 왕실 구성원들에 대한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궁정에 있는 한 유럽의 어느 왕도 스페인 왕보다 뛰어난 초상화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 <시녀들> 

1986년 런던의 한 잡지사에서 당시 활동하던 미술 평론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작품이 스페인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는 이 작품만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두컴컴한 방에 작품 한 점만이 특별한 조명을 받으며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 한 번도 스페인 밖을 나간 일이 없습니다. 그만큼 스페인 사람들의 보물로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특별해지는 순간 중 하나는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볼 때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대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데생 한 뒤 정성스럽게 색을 칠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다가가서 보면 소매에 달린 레이스 장식이나 공주의 금발머리는 물감을 그냥 쓱쓱 발라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 물감 자국들은 신기하게도 레이스 장식이 되고 금발머리가 됩니다. 밑그림 없이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 피카소, 프란시스코 고야, 에두아르 마네, 살바도르 달리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7년 피카소는 무려 58점의 패러디를 그려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고, 살바도르 달리는 작품 속 인물을 숫자로 대체한 유머러스한 작품을 그려내기도 합니다. 시녀들의 어떤 특별함이 사람들의 시선을 이렇게 붙잡는 걸까요?

 

1650년대부터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습니다. 마르가리타는 오스트리아 왕실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요. 때문에 벨라스케스는 오스트리아 왕실에 보내기 위한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려야 했습니다.

 

<시녀들>은 마르가리타가 5살일 때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이전에 그렸던 마르가리타의 초상화와는 달랐습니다. 인물만 11명이 등장하는 거대한 집단 초상화였습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이 작품을 보면 큰 네모와 그보다 작은 세모 2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에 기둥과 천장, 왼쪽에 캔버스에 이르는 큰 테두리가 주요 인물들을 감싸고, 정중앙에는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가 서 있습니다. 그는 그 자체로 작은 세모이고 양옆에 시녀들이 이루는 더 큰 세모 안에 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마르가리타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조용히 엎드린 큰 개와 2명의 난쟁이들이(왜소증 환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물이나 음식 같은 필수품을 갖고 다니며 언제나 공주를 동행하던 이들입니다. 그 뒤로는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는 빛을 사용해 대상에게 부피감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마르가리타를 밝게 비춥니다. 마르가리타의 얼굴도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르가리타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마르가리타의 왼쪽으로는 화가 자신도 보입니다. 그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스페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입니다. 1658년 30년 넘게 공정화가로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죠. 당시 화가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그건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 십자가는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훗날 덧 그려진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가 기사 작위를 받은 건 <시녀들>을 완성하고 2년이 지나서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그림을 그릴 때 십자가는 없었을 겁니다. 그는 왜 십자가를 나중에 그려 넣었을까요? 자신이 이룬 사회적 성공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그림에 활용된 빛은 또 있습니다. 바로 뒤쪽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입니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바깥의 빛이 안으로 쏟아지고 어두운 배경과 선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이는 마르가리타에 붙잡혀 있던 시선을 끌어내 뒤쪽에 초점을 맞추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화면에 거리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왼쪽으로 조금 더 옮기면 거울에 반사된 국왕 부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국왕 부부에게로 시선이 옮겨가면 이윽고 수많은 의문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왜 국왕 부부가 거울에 비치고 있는 걸까요? 거울이긴 한 걸까요? 많은 학자들은 이 그림을 벨라스케스가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장면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국왕 부부는 지금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을 겁니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국왕 부부가 정면의 거울에 비치고 있는 것이죠. 마르가리타 공주와 신녀들은 작업을 구경하려고 화실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건 국왕 부부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공주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림 자체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에 비친 마르가리타를 그리고 있고, 마르가리타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겁니다. 오랫동안 포즈를 취하느라 짜증이 났는지 옆의 시녀가 달래려는 듯 음료수를 건네고 있습니다.

 

시녀들은 이처럼 시선을 붙잡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줍니다. 큰 네모와 2개의 작은 세모라는 안정적인 구도 속 우리의 시선은 역삼각형을 그리며 바쁘게 움직이죠. 그만큼 각자의 감상 포인트도 다르고 해석도 다릅니다. 이 작품은 원래 <시녀들과 여자 난쟁이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라는 긴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843년 프라도미술관에서 <시녀들>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후 <시녀들>이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이렇게 다양했다는 건 사람들이 이 작품 앞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수많은 난쟁이 그림들과 그에 담긴 벨라스케스의 마음 

디에고 벨라스케스&#44; 난쟁이 세바스찬 데 모라
<난쟁이 세바스찬 데 모라> 1644 프라도 미술관

 

 

벨라스케스가 자주 그린 궁정 인물이 또 있습니다. 그저 왕실 가족의 노리개일 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궁정의 하인이었던 난쟁이들입니다. <난쟁이와 함께 있는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은 벨라스케스가 난쟁이를 그린 가장 첫 작품입니다.

 

왕이 어렵게 얻은 아들 카를로스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예식용 의복에 붉은 어깨띠를 두르고, 아기임에도 위험 있는 자세로 서서 미래의 통치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왕실 가족이 지루함을 덜 수 있도록 웃음과 휴식을 주는 애완동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난쟁이들은 어린 왕자와 공주가 잘못을 저지르면 대신 매를 맞는 역할도 했습니다. 왕실 초상화에서 난쟁이가 등장하면 대부분 왕실 가족의 근엄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는 난쟁이만의 단독 초상화를 그리며 그들의 이름을 작품에 남겼습니다. 초상화를 통해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바라본 것입니다. <세바스티안 데 모라>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뚫어질 듯 바라보는 난쟁이의 시선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작품 속 난쟁이의 모습에서는 왕을 위한 어수룩한 모습이나 희극적인 요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강렬한 시선과 굳게 다문 입에서 우리는 그의 내면이나 성격, 그리고 그만의 개성을 엿보게 됩니다.

 

난쟁이가 벨라스케스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으며 초상화의 모델이 된 것은 벨라스케스가 평소에 이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진실한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벨라스케스는 난쟁이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벨라스케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으로 스페인에서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왕에게 인정받아 귀족 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바로 직전해야 겨우 귀족 신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능력 있는 궁정화가였음에도 자신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벨라스케스였기에 차별의 대상이었던 난쟁이와 자신을 같은 처지로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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