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대사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영국 내셔널 갤러리

 

16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라고 일컬음을 받는 한스 홀바인 2세 한스 홀바인 더 영거( Hans Holbein the Younger)는 독일 남부의 상공업이 발달했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이 똑같은 그의 아버지도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스 홀바인 디 엘더(Hans Holbein the Elder)라고 붙이고 아들은 더 영거라고 붙입니다. 그래서 한스 홀바인 2세 또는 한스 바인 더 영거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매우 정밀하고 사실적인 화풍을 익혔습니다.

 

인물에 대해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 또는 정확한 세부 묘사 그리고 명쾌한 화면 구성으로 단순한 초상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포착하는 데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에 한 명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의미들이 숨어 있는 한스 홀바인의 대표작 <대사들>  

반짝이는 핑크빛 실크와 섬세한 레이스, 화려한 털 장식이 돋보이는 옷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남성. 마찬가지로 윤기가 흐르는 털코트를 여미며 살짝 기대서 있는 또 다른 남성 입은 옷만으로도 이들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엔 지구본, 해시계, 악기와 책까지 과학부터 예술을 아우르는 이들의 높은 학식을 과시하는 듯 보입니다. 이 그림엔 어느 하나도 대충 그려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치밀한 그림에 치명적인 오류가 보입니다.

 

바로 바닥 중앙에 그려진 알 수 없는 형상입니다. 대체 이건 뭘까요? 사실 이 그림은 속 세상에서 가장 치밀하게 설계된 작가의 치밀한 계획 중 하나입니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한 발 떨어진 위치에 서서 다시 한번 더 작품을 봐야 합니다. 그제야 알 수 없던 바닥의 형상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이죠. 해골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기이하게 그린 이유는 왜상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메시지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숨기기 위한 것입니다. 숨겨진 메시지를 알아차렸을 때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심리를 기대한 것입니다.

 

작가는 이들이 실존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간접적으로 나이를 표현합니다. 댕트빌이 쥐고 있는 단검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나이가 29살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드셀브가 오른팔을 얻고 있는 책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씨 역시 그의 나이를 말해줍니다.

 

대사들은 그림 중심에 인물을 그려 넣은 여타 초상화들과는 구도부터 다릅니다. 이 그림은 두 인물 사이를 뚝 떨어뜨려 놓았고 중앙에 위치한 선반에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다양한 오브제를 두었습니다.

 

이는 전에는 본 적 없던 특별한 초상화로 보이게 하고 동시에 화면 중앙에 놓인 사물과 그 속에 숨긴 의도에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림에 숨겨진 수수께끼와 시대를 집약한 세밀한 상징물, 이 모든 것은 대사들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선반 상단에 놓인 최신 과학기구들은 이는 16세기 과학의 발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두 주인공을 근대적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한편 정치적 의미를 담은 부분도 있습니다.

 

천구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닭이 독수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닭은 프랑스를, 독수리는 유럽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프랑스가 유럽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연, 월, 일을 표시하는 다 해시계에는 4월 11일 10시 30분을 가리킵니다. 영국왕이 왕비와 이혼한 시각인데, 작가는 바로 이때가 영국과 가톨릭의 결별이자 분열에 따른 유럽의 위기 순간임을 표현해 냅니다.

 

류트와 플루트. 두 권의 책이 그려진 서랍의 아래단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에 발전된 예술과 학문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기울어진 유럽 정세를 설명합니다. 

 

자세히 보면 현이 끊어진 류트는 프랑스와 영국의 조정 업무가 실패로 끝났고, 유럽의 조화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쟁의 신 아테나의 상징인플루트는 5개의 관 중 가운데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이는 각국이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을 강조합니다.

 

악기 옆에 찬송가집 역시 실제 성가 확보를 바탕으로 그려졌는데 왼쪽 페이지는 십계명을 의미하는 성가이고, 오른쪽은 루터파의 합창곡입니다. 각각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개신교를 대표하는 찬송가인데, 두 교파 간 갈등을 해소해 원만하게 일이 마무리되길 바라는 주교의 염원을 담아낸 것입니다.

 

한편, 빨간 커버가 돋보이는 책은 1527년 독일에서 출간된 <상인 산술 교본>입니다. 미세한 글씨로 적힌 페이지에 다름 아닌 나누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임무가 분열로 끝날 것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책 페이지에 작게 적힌 내용, 악기의 모양 하나까지도 꼼꼼한 설계를 바탕으로 그립니다. 대항해 시대였던 당시를 지구본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과학 도구들, 이는 세계 일주와 신대륙 발견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동설이 발표됩니다. 학계와 종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죠. 시대에 높은 과학적 지식,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홀바인은 이 모든 것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그림의 디테일함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치밀함의 백미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해골과 그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바닥에서 눈길을 끄는 일그러진 커다란 해골, 대사의 모자에 수 놓인 작은 해골까지 홀바인은 작품 곳곳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해골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도 역사의 이슬로 사라졌듯 인생은 덧없으니 지나친 허영을 경계하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의 메시지도 잊지 않습니다.

 

댕트빌 대사의 뒤쪽 미세하게 열려 있는 커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은재의 십자가상, 십자가상은 죽음과 동시에 부활이라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죽음을 생각하며 겸손하라는 말과 함께 그 이후 찾아올 희망까지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대사들의 차분한 분위기, 일그러진 형태의 미스터리한 해골 형상 어울리지 않는 둘은 한 화면에 담겨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정면, 측면, 멀찍이 또 가까이 대사들 속 모든 요소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여러 방향과 위치에서 감상해야 하는데, 화려한 대사들의 모습을 마주하는 정면 무서운 해골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측면, 삶과 죽음은 결코 같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해골을 바라보는 각도에서만 이 그림을 감상한다면 인류가 치열하게 싸운 지식과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 없을 겁니다.

 

 헨리 8세와 그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 

화가 한스 홀바인은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초상화 한 점을 너무 잘 그려서 죽을 뻔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궁정화가라는 직업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건 극한 직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헨리 8세는 당시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었습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평생 이혼을 거듭하며 무려 6명의 왕비를 맞이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중에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를 그린 왕비는 모두 셋입니다.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 네 번째 부인인 클레베의 , 다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하워드입니다. 계속해서 궁정화가로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와 이혼하고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블린과 재혼했습니다. 젊은 여인 앤 블린과 1533년 1월경에 두 번째 결혼을 올리게 됩니다. 그토록 그가 원하던 일이었지만 이 두 번째 결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헨리 8세는 이번에도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을 했고 앤 블린과 그의 가문을 미워했던 정적 토마스 크롬웰이 제인 시모어를 지지하면서 앤 블린과 애블린 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이혼하기 위해서 남동생을 비롯해서 총 5명의 남자들과 간통했다는 수치스러운 누명을 씌워 엠블린과 그의 가족을 참수시켜 버립니다.

 

제인 시모어는 1537년 헬리파스가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을 낳아줍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서 이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그 유명한 에드워드 6세입니다. 헨리 8세가 그렇게 원했던 왕자를 낳아주고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은 지 12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죽고 맙니다.

 

제인 시모어가 죽고 왕비의 자리가 비었으니 새롭게 왕비를 구해야 되겠는데, 당시에 궁정 화가의 역할 중에 하나가 중매쟁이 었습니다. 궁정화가가 먼저 가서 신붓감의 얼굴을 그려오면 왕이 그 얼굴을 보고 결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홀바인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라고 여겨졌으니까 이 임무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토마스 크롬웰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독일의 변방 개신교 공국이었던 클레베 공국의 둘째 딸이었던 클레베의 앤이라는 여인을 추천하게 됩니다.

 

이때 다시 중매쟁이 화가로 파견된 사람이 한스 홀바인이었습니다. 크롬웰은 한스 홀바인에게 왕의 마음이 쏙 들도록 초상화를 잘 그려오라고 홀바인에게 단단히 명령을 합니다.


초상화를 본 헨리 8세는 맘에 쏙 들어 클레베의 앤과 결혼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결혼에도 클레베 공국의 절박한 정치적인 사정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당시에 개신교를 택했던 클레베 공국의 입장에서 주변에 스페인과 프랑스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클레베 공국의 입장에서는 신교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헨리 8세와 정치적인 동맹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1540년 1월 3일 클레베의 앤이 드디어 영국의 궁전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헬리팔세는 그만 궁궐 안에 들어오는 앤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맙니다. 홀바인이 그려 보냈던 그 초상화와는 너무 다른 여인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오~ 플랑드르의 암말, 육중한 몸매와 늘어진 피부를 가진 못생긴 저 노란 머리 여자를 거둬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헨리 8세라고 해도 국가 간의 일인지라 약속된 결혼을 당장 취소할 수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거행하고 앤을 네 번째 부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앤의 실제 모습을 보고 헨리 8세가 얼마나 실망을 했던지, 자신의 치세 동안에 입안에 혀같이 굴던 토마스 크롬웰을 런던탑에 가뒀다가 참수형을 하고 맙니다. 자칫하면 홀바인도 죽을 수 있었으나 궁정허가의 직위를 박탈하는 수준에서 마무리가 되고 목숨은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화가로서 홀바인을 헨리 8세가 신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그의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던 한스 홀바인 그는 헨리 8세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헨리 8세 옆에서 궁정화가 노릇을 하면서 그가 보았던 정치의 세계, 그가 보았던 종교의 세계, 또 권력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1543년 영국에 퍼져 있었던 페스트에 감염되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 톺아보기 

무덤 속의 그리스도&#44; 한스 홀바인
<무덤 속의 그리스도> 1520~1522 스위스 바젤미술관

 

 

한스 홀바인이 직업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다음 해 21살 때 그는 다소 충격적인 그림 하나를 그리게 됩니다. 바로 1521년에 <무덤 속의 그리스도>이라는 작품입니다. 관 모양의 액자의 실물 크기로 그린 그림인데 제목 그대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예수의 시신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제 막 죽음이 도착한 예수의 몸과 그 몸이 누워 있는 관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것 같은 눈,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듯이 위로받은 턱과 수염들, 그리고 이제 막 죽어서 푸른 기운이 나는 듯한 얼굴 아주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더 쇼킹한 것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우리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관의 죽음 가운데 있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서 손가락 욕설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욕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스 홀바인이 죽은 예수의 시신을 그리면서 왜 손가락 욕을 하는 그림을 그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스바인과 동시에 활동했던 2명의 인물을 알아야 합니다. 1명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또 한 사람은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입니다.

 

먼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한스 홀바인 보다 약 13살 정도 위입니다. 당시에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신부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하면서 소위 95개 조 반박 논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에 불을 댕기게 됩니다.

 

그가 논박하는 핵심 중의 하나는 소위 당대 면제부, 면벌부 판매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벌부 또는 면제부를 돈을 주고 구입하면 연옥에 떨어진 사람까지라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당대 교회의 행태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마르틴 루터는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루터는 새로운 종파를 창시하고자 하는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끝내 루터의 이런 비판과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가톨릭 교회와 결별해서 '프로테스탄트' 즉 항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개신교가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럽 사회는 한동안 종교적인 대혼란과 나아가서 극심한 종교 전쟁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점차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개신교가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그 지역에 있는 화가들에게는 생계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됩니다. 이유는 개신교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교회에 재단화를 그리는 것이 너무 사치스럽고 또 우상에 해당될 수 있다고 해서 금지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화가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교회 재단화를 그릴 수 없게 되자 커다란 위기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한스 홀바인이 대륙이 아닌 영국으로 넘어가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한스 홀바인은 기존의 가톨릭이 비판적이었던 새로운 종교개혁의 흐름의 한가운데 그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틴 루터는 그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고,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한 인물은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였습니다.

 

에라스무스 종교개혁 시대의 최고의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이 스위스 바젤로 가서 화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그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 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신예찬'이라는 책입니다. '우신예찬'에서 우신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신을 말합니다. 당대의 교회들이 참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바보스러운 신을 섬긴다라고 풍자한 것입니다. '우신예찬'이 발표되자 학자와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 사후에 금서 목록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당대 가톨릭 교회의 탈락상과 부패를 고발한 이 에라스뮈스의 저서들과 사상은 이 이후에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 생각을 깊이 받아들였던 사람이 바로 한스 홀바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당대의 종교를 향해서 한바탕 욕을 날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스 홀바인의 이 욕하는 예수의 손가락은 사실은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을 자기 나름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