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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수많은 역작으로 물들인 위대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과 자유롭지만 확신에 찬 선으로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앙리 마티스. 특유의 화풍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만들어내며 20세기 회화 장르의 혁명가로 평가받는 앙리 마티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평범한 회사원, 색채의 마술사가 되다
1869년 프랑스의 프랑스 북부의 르 카토 캉브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의 부유한 곡물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마티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실제로 마티스는 법을 공부하고 젊은 시절 한때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21살 되던 어느 날 맹장염을 앓고 합병증까지 겹쳐 1년여간을 요양하며 보내게 된 마티스는 그의 어머니에게 물감과 붓을 선물 받으며 그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퇴원 이후나 출근 전, 새벽이나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쪼개가며 미술 수업을 받는데 이때 마티스는 미술이 자신의 길임을 확신합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져든 마티스는 22살의 늦은 나이로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됩니다.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에 홀렸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파라다이스로 옮겨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뭔가가 나를 몰아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크게 반대했습니다. 파리의 미술학교를 가기 위해 아버지의 지원이 필요했던 마티스는 긴 설득과 대화 끝에 승낙을 얻습니다. 그 당시 그는 정지된 물체를 그리거나 오래된 명작을 베기는 등의 딱딱한 방식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마티스가 대학에 들어가 그린 초기작들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체와 다릅니다. 하지만 점차 마티스는 자신만의 화풍에 눈을 뜨게 됩니다.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고흐, 고갱, 그리고 세잔으로 대표되는 도발적인 후기 인상파 작품에 열광하고 있었고, 혈기 왕성했던 마티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파리의 대규모 전시회에 예전보다 밝은 색을 사용한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이 작품들이 호평을 받으며 무명 화가였던 마티스는 점차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와의 라이벌 입체파 피카소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과 자유롭지만 확신에 찬 선. 야수파의 창시자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힙니다.
빛의 영향을 받아 명암을 강조하거나 빛에 의한 사물의 변화를 관찰하여 그림을 그린 기존의 화가들과 달리 마티스는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빛에 의존하지 않은 특유의 색을 사용하여 ‘야수파(Fauvism)’라고 불리었습니다.
1905년경부터는 이른바 ‘야수파’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티스는 강렬한 색에 집중한 작품들로 원색의 대비, 단순하고 과감한 선을 바탕으로 점차 색을 강렬하게 사용하는 기법을 시도하던 그는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과 같은 강렬한 색상 대비와 활달하고 역동적인 붓놀림을 사용하였습니다.
1906년에 한 살롱 안에서 젊고 주목받는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바로 피카소였습니다. 당시 후기 인상주의의 뒤를 이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마티스였지만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피카소와 마티스는 금세 강한 라이벌 구도로 성장합니다.
둘은 모두 프랑스에서 활동하였고 정물, 여성의 얼굴 같은 비슷한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비교가 쉬웠습니다. 또 둘 간의 차이도 선명했습니다. 그 당시 피카소는 상상 속의 대상을 우울하고 심각하게 그려냈다면, 마티스는 자연 속의 대상을 밝고 순수하게 그려냈습니다.
덕분에 입체파와 야수파의 대립 구도는 나날이 커져 나갔고, 둘의 유명세 또한 더해져 갔습니다. 피카소와 마티스를 경쟁구도로 몰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가들의 후원가로 잘 알려진 레오 스타인과 거트루드 스타인 남매입니다. 이들 남매가 이 두 화가의 그림들을 잇달아 사주면서 이 둘은 서로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암울한 사회배경에도 순수하고 행복한 마티스의 그림들
단순한 형태와 밝고 순수한 색감, 자유분방한 사람과 사물들 마티스 작품에는 특유의 순수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마티스의 대표작 <삶의 기쁨>은 밝은 빨강과 눈부신 노란, 깊은 초록 같은 풍요로운 색채를 이용했는데, 꽃과 대화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가득한 낙원 속 모습을 그렸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천국을 그려 넣은 듯한 이 작품은 마티스의 정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발표하고 비판은 거셌습니다. 마티스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습니다. 더군다나 전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 살고 있었고 당시 유럽 사회는 전쟁 위험과 함께 많은 불안과 사회적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마티스의 작품은 이런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오로지 밝은 분위기만을 담아냈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었습니다.
피카소도 이 작품에 반대하는 느낌으로 우울한 느낌으로 경쟁작을 내놓기도 합니다.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습니다.
평단의 비판에도 마티스는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과 행복을 그려내는 일에 매진합니다.
" 균형 잡힌 때 안 묻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처 같은 그림을."
그는 노년에 접어들 때까지 다양한 작품 시도와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1941년, 70이 넘은 나이에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됩니다. 그 후로는 합병증으로 13년간 침대와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더 이상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 작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티스는 이 방식을 가위로 그리는 그림이자 조각가의 정교한 작업과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습니다. 그는 이 당시 만든 작품들이 드디어 틀에서 해방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위대한 화가는 결국 1954년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프랑스의 따뜻한 해안 도시 니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행복을 그려나간 앙리 마티스.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과 자유롭지만 확신에 찬 선으로 세간의 비판에도 계속해서 작품 속에 세상에 없던 밝음과 순수함을 담아내려 했던 마티스. 세상이 어둠을 맞이했을 때에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