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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원에서 49살에 예술가를 향한 루소의 색다른 길
앙리 루소는 1844년 프랑스 르발에서 작은 마을에서 양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흥미가 있었지만,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현실을 잘 받아들이며 법을 공부하고, 관세청에 가입하고, 관세관으로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려운 삶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주말마다 혼자 독학으로 익힌 그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말 화가'라고 불렀습니다.그는 1886년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2년 전인 1884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명화를 모사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루브르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그림을 모사했고 수료증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전시회에 정규적으로 참여를 했지만 그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 대부분은 거절당했습니다.
파리의 살롱 데 르퓌제(거부당한 자들의 살롱)에 참여하면서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입체파 청년 피카소, 야수파 마티스와 같은 현대 미술의 선구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루소는 다리에 고름이 차는 피부병 중 하나인 봉소지염이라는 화농성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병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해 8월 결국 이 병으로 피부가 썩는 심한 염증으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그는 사망 당시에도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루소의 장례식은 그의 가장 절친했던 지인 7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 묘지 한쪽 코너에 묘비도 없이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사람들은 그를 다시 제대로 된 묘지에 묻어주고 묘비까지 세워주게 됩니다.
그의 작품은 순진한 표현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인해 '나이브 아트'의 대표적인 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가 66세에 사망할 때까지 약 200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비평가들의 평가 vs 찬미자 피카소와 마티스의 엇갈리는 평가
당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의 신기한 그림을 비웃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미술계에서는 앙리 루소의 작품을 무척 폄훼하고 심지어는 "난쟁이 몸에다 절구통 같은 머리를 얹어놓은 그림에 자아상이란 제목을 붙인 걸 보면 화가는 분명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또는 매우 서투르다, 원시적이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다라고 혹평을 받았습니다.
사실 앙리 루소만큼 악평에 시달렸던 화가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그런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다 못한 한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의 그림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우리가 그런 그림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비웃음거리가 된단 말인가?"
그는 평생 많은 평론가들에게 조롱당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1897년 그는 그의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인정받는 <잠자는 집시 여인>을 완성하게 됩니다. 1905년에는 그의 또 하나의 대작인 <영양을 덮친 배고픈 사자>라는 작품을 전시하며 당시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리더였던 앙리 마티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루소보다 37살이나 어린 파블로 피카소가 길거리에서 캔버스를 다시 사용할 목적으로 팔린 루소의 작품을 우연하게도 발견하게 됩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보며 루소의 천재성에 감동을 받아 그를 찾아갑니다. 유명의 천재 화가가 무명의 천재를 찾아가는 그런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피카소는 앙리 루소의 가치를 기리기 위하여 반은 진지하고 반은 장난으로 그를 기리는 연회까지 열어주었고, 루소 보다 22살 어린 칸딘스키는 루소의 옹호자로 유명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수 세 달 동안 아방가르드는 유명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가 죽자마자 뉴욕, 이탈리아, 독일을 시작으로 그의 이름을 건 대형 전시회가 진행되었고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던 <잠자는 집시 여인>은 그가 죽은 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구매해 지금까지 미술관 5층에 피카소와 고흐 그림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걸작 스포트라이트 루소의 상징적인 그림 <꿈> 분석
당시 예술가들 중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루소를 좋아했습니다. 새로운 미술을 원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찾던 게 루소의 그림 속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루소의 <꿈>이라는 작품에 사용된 녹색 몇 가지일까요? 무려 50여 가지나 됩니다. 짙은 녹색, 더 짙은 녹색, 밝은 녹색 이런 식으로 녹색으로 불리는 하나의 색을 50여 개로 차이를 두어 그릴 수 있는 색에 대한 감각. 이것이 바로 루소의 천부적인 재능이었습니다.
이런 색에 대한 재능이 드러난 작품이 정글을 그린 정글화 연작입니다. 앙리루소의 정글 그림은 유명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정교한 정글 그림을 보고 그가 당연히 정글에 가보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당시 파리 식물원에 자주 다니며 꼼꼼히 기록해 놓은 걸 토대로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미술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할 때 루소 이전까지는 정글화라는 장르는 없었습니다. 루소가 아예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리는 묘사 능력과 원근법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던 루소는 색의 밝기, 밀도를 이용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웠습니다.
서툰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 유치한 그림이 아니라 순수한 그림 그의 그림 속에는 유쾌함, 순수함, 소박함, 기발함이 있고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옵니다.
루소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수많은 연구와 전문서가 출판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존재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