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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1897) 티센-보르네미자 박물관

 

 

카미유 피사로는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늦은 나이에 그림 공부를 시작해 인상주의 화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여러 화가들의 친구이자 마음의 안식처,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카미유 피사로는 마네, 모네 , 르누아르만큼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를 빼놓고는 인상주의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그는 늘 맏형 노릇을 하면서 개성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었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잣집 도련님 가정부와 결혼하다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레데릭은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외삼촌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사로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사로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는 피사로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가 돌아와 자신이 사업을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비자로는 유학생활 동안 그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피사로는 17세 되던 해 세인트 토마스 섬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사업보다는 늘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즐겼습니다.

 

1855년 20대 중반이 된 피사로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가족 전체가 태어나고 자란 중남미 지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 겁니다. 파리에 도착한 피사로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바르비종파의 한 명인 카미유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4년 만에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당시 최고 전시회인 살롱에 풍경화를 걸 만큼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피사로의 평생의 사랑을 받은 줄리 벨리(Julie Belli)를 만난 시기도 이 무렵입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고용한 가정부였습니다. 그러나 피사로가 결혼 계획을 밝혔을 때 그의 부모는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그녀의 가정부로서의 신분, 별 볼일 없는 시골 지역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유대인이 아닌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종교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우려를 포함하여 수많은 반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는 자신의 분야에서 확고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 사람들은 피사로가 가정부와 결혼한다고 수군거렸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조건 좋은 남자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훗날 피사로가 줄리와 결혼한 건 더없이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유망한 화가였던 피사로는 클로드 모네, 폴 세잔처럼 인상주의자라고 불리는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안 팔리는 화가’이자 무능한 가장이 되었고, 줄리는 그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훌륭하게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 풍경화의 거장, 잠깐의 외도 

다른 화가들이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할 때도 그는 인상주의 철학을 고수하며 꾸준히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피사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현혹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대담해져야 한다."

 

그의 그림에 관한 열정은 평생 식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살롱에 출품했고, 8회에 걸쳐 열렸던 인상주의 전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출품했고, 아들에게도 그림을 권유해 결국 화가로 만들었던 그는 진정 그림을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파리 살롱 전에도 꾸준히 그림을 출품하며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던 피사로는 36살 되던 해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보불 전쟁으로 파리의 집은 붕괴되고 그가 20년간 그린 작품 1500점가량이 사라진 건 특히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파리 근교의 시골 퐁투아즈로 이사를 갑니다. 피사로가 마흔네 살 되던 1874년 파리의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이었습니다. 이들과 어울리던 피사로는 이 전시에 6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전시는 4주 동안 열렸고, 35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가지만 그들의 평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피사로가 친구 뒤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전시를 본 비평가들이 우리를 조각조각 찍고 있다네."

 

피사로는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움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55세에 화가 조르주 쇠라를 만나게 됩니다. 쇠라와 폴 세잔이 발전시킨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그 실험적인 방식을 적용해서 그도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수많은 점을 찍어 색채를 표현하는 섬세한 붓놀림을 통해 추운 겨울 불을 지펴서 몸을 녹이는 농촌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평생을 쏟은 인상주의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였지만, 1890년 “나의 도전은 실패했다”며 원래 화풍으로 돌아갔습니다. 

 

 평생을 바친 풍경화, 몽마르트 거리의 연작을 남기다 

몽마르트의 밤. 카미유 피사로
몽마르트의 밤(1897) 런던 내셔널갤러리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 실력에 관해 항상 겸손했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기질은 촌스럽고 투박하다. 아마 많은 노력을 해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만년의 눈병을 얻은 피사로는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대신 실내에서 야외 풍경을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몽마르트 대로 연작도 그가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며 여러 가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몽마르트 대로는 1897년 겨울과 봄 사이에 그린 총 14점의 연작으로 제목을 보고 그림을 보면 그 시간대와 날씨의 분위기에 따라 파리의 거리 풍경을 뛰어나게 묘사한 피사로의 실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몽마르트 거리의 겨울 아침은 부서질 듯한 진줏빛 겨울 하늘과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느껴집니다. 거리 양옆으로 빈틈없이 쭉 이어진 건물들과 길게 자란 앙상한 가로수들, 그리고 공중전화 등 당시 몽마르트 대로의 모습이 거친 붓질로 묘사됐고, 전체적으로 짙은 색조가 겨울에 깊고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몽마르트 거리의 구름 낀 아침은 날이 흐릴 때 그렸습니다. 아침이지만 구름 끼고 흐린 날씨 탓에 햇살이 비치지 않아 거리가 묘하게 어두워 보입니다. 몽마르트 대로의 봄 풍경은 오랜 겨울이 지나고 생명이 태동하는 따스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 햇살은 좀 더 강해져서 사람들 밑으로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구름은 솜털처럼 가볍고, 나무는 푸르게 잎사귀가 돋아났습니다. 특히 압권은 <몽마르트 거리의 밤풍경>입니다.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불빛에 하늘은 땅에 가까울수록 밝다가 위로 갈수록 점차 어두워지는 것까지 표현했습니다. 일렁거리는 불빛과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그리기 위해 붓터치를 번지듯이 했고, 또 점묘법을 일부 쓰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형체 없이 긴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연작을 보면 사람들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와 마차 소리까지 저절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 대로를 거니는 수많은 파리 시민들은 개개인들이라기보다 풍경의 하나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구성에 미술의 기초인 원금법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카미유는 풍경을 실제 그대로 재현하려는 고전적인 관점보다는 화가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풍경을 그렸지만 단순히 풍경 그대로를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카미유가 말년에 그린 이 연작을 통해 인상주의자들의 관심사였던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날씨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어떻게 잘 담아낼 것인지, 그가 평생 끊임없이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피사로는 평생을 그림과 함께 살다가 73세가 되던 19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에게 적잖은 유산도 남겨줄 수 있었고, 줄리는 1926년까지 살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았습니다. 까미유 피사로답게 그는 죽기 바로 전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외부로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르아부르 항구 근처 호텔에 머무며 항상 창가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폴 세잔은 피사로를 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사로는 최초의 인상파 화가입니다. 우리는 모두 피사로에게 배웠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말대로였습니다. 고흐와 고갱, 세잔, 쇠라 등 근대와 현대를 잇는 위대한 거장들이 모두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양 미술사에 남긴 유산은 훨씬 더 컸습니다.

 

그의 그림은 한눈에 우리를 사로잡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풍경 아래 보면 그의 온유한 성품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피사로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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