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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불안, 고독과 상실의 그의 어린 시절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는 1863년 당시 가난하고 공식적으로 스웨덴에서 해방되지 않았던 노르웨이 사이 로이튼 지방의 빈민가에서 열렬한 경건주의자인 아버지와 폐결핵에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불안과 고독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의 이별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뭉크가 5살 때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3살이 되었을 때는 2살 위의 누이를 폐병으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여동생 중 하나는 우울증으로 인한 착란 증세로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죽음을 지켜본 뭉크는 생애 내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엔 죽음의 공포로부터 나타난 불안감이 내재돼 있습니다. 어머니 여동생인 카렌 리모가 어머니 사망 후 어린아이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와서 같이 살게 되었고, 카렌은 화가였기 때문에 몽크가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뭉크 역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병약하였으며, 만성 천식 류머티즘 환자에다가 스페인 독감에 걸리기도 하고, 평생 조울증 증세로 고통받아 술을 과도하게 마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요양시설에서 8개월간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1889년 12월 뭉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성년이 된 이후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은 뭉크에게 많은 상실감을 가져다줬습니다. 그의 우울감은 커져갔고, 이는 결국 삶의 의지마저 꺾게 하였습니다.
이 시기 뭉크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반대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뭉크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자신만의 화풍을 고민하며 새로운 미학적 고민을 담아낸 '멜랑콜리'라는 작품을 선보이는데요. '멜랑콜리'란 병약함과 정신병으로 정신이 우울에 닿아있다는 뜻입니다. 유럽의 여러 현대 예술을 접한 뭉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작품 속에 담으려 했습니다.
뭉크의 여성상: 그가 만난 여자들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
뭉크는 항상 자신이 질병과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생각했습니다. 80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결혼은 한 적이 없으며, 짝사랑했던 여인들에게 숱한 거절을 겪으며 여성 혐오적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을 괴롭히며 끝내 파멸시키는 팜무파탈적 위협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의 삶 속에도 연인과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885년 당시 22살이었던 뭉크는 자신의 첫사랑인 밀리 타우로브를 만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결혼한 상태로 뭉크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장난처럼 둘은 몰래 달빛이 비치는 숲 속에서 밀회를 즐기곤 했습니다. 뭉크는 밀리가 이혼을 하고 자신에게 와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동안 몽크에게 그 어떤 기별도 하지 않아 몽크는 크게 실망하고 배신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때의 좌절감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다른 연인들을 만나지만 뭉크의 우울과 불안은 자신의 사랑을 망치곤 했습니다. 밀리는 일생 동안 뭉크의 작품에서 도도한 흡혈귀처럼 등장하곤 합니다.
1894년 그려진 '마돈나'를 보면 정자와 태아가 그려진 테두리가 있는데 모두 이미 죽었거나 힘이 빠진 모습으로 마치 인간 존재가 이미 질병과 죽음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한 메시지와 함께 여성으로 인해 끔찍한 사랑의 고통에 대해 경고라도 하는 듯, 나체로 유혹하는 듯한 여성을 팜무파탈적 이미지로 그려져 있습니다.
1897년에 만난 마틸드 튤라 라르센은 밀리와의 이별을 뒤로하고 잠시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심한 집착에 뭉크는 헤어짐을 통보합니다. 1902년 그녀의 마지막 부탁으로 뭉크의 아뜰리에서 만난 둘은 말다툼을 하다가 잘못 발사된 초기 사고로 뭉크는 왼손의 중지를 영원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뭉크는 '살인자' 등으로 여성을 더욱 과격하게 묘사하거나 마녀나 악마 같은 모습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큰 충격과 분노로 뭉크는 튤라뿐만 아니라 공통으로 알았던 모든 지인과의 연락을 통째로 모두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1903년 만난 에바 무도치는 영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뭉크와는 1908년에서 1909년까지 연인이었고, 1927년까지 연락을 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뭉크에게 고통, 고뇌, 절망은 사랑과 성적인 것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질병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 배제된 기분, 고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도심의 군중 안에 창백한 얼굴을 한 모습이든 대자연 안에서든 그것은 영원한 것이었고, 인간이 자의적으로 억압할 수 없는 힘으로 인식됩니다.
대표작 <절규>의 이해와 생애 프리즈
에드바르 뭉크 불안과 고독을 그리는 예술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선과 폭발하는 듯한 색감 에드바르 뭉크는 특유의 어두운 화풍으로 자신만의 예술관을 정립하며 세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80년의 인생 동안 2만 5천여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절규 입니다. 휘청이는 대자연과 불안한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 둘을 분리해 주는 듯한 불안정한 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은 정확히 말하면 <절규>가 아닙니다. 뭉크가 처음 이 작품과 함께 공개한 메모에 <자연의 절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의 강박 관념과 환각은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고, 절규도 직접 겪은 정신 착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고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두 친구들과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기진맥진한 기분을 느끼며 멈췄고 펜스에 기대어 섰다. 푸른빛 검정의 피오르드와 도시 위에는 피와 불의 혀들이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불안에 떨며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가로질러 지나는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며 주인공인 뭉크는 절규를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절규를 환각과 환청을 통해 보고 들은 것, 이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뭉크는 앞쪽에 인물을 배치하고 뒤로 긴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난간을 그림으로써 시선이 자연이 앞쪽에서 뒤로 이어지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비명이 오른쪽 앞에서 왼쪽 뒤로 꿰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그 소실점의 끝에는 피와 불의 혀가 넘실대듯 구불거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의 자신의 심리를 투영시킵니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전부일뿐만 아니라 영혼의 내면도 포함한다. 비명을 지른 것이 자신이었는지 자연이었는지 뭉크는 정신 착란에 빠져 있습니다. 뭉크의 예술은 끊임없는 실험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서투른 것 같고 거칠며 무언가 조화롭지 못하고 분노에 차서 그림을 그린 것처럼 거칠게 표현되었으며 미완성 같습니다. 뭉크의 예술 세계를 말할 때 '생애 프리즈'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프리즈란 일반적으로 건축에서 장식적 주제를 반복하여 구성된 수평의 띠 모양 부분을 말합니다.
그는 왜 '생애 프리즈' 곧 '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 '인가하면, 뭉크는 자신의 예술을 자백적 자서전처럼 그렸다고 한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 인간의 인생을 주제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한 전시실의 벽면을 쭉 따라 전시했기 때문입니다.
일생 동안 그가 그린 작품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되며, 그가 구상한 '생애 프리즈'는 4개의 큰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자각, 사랑의 개화와 쇠퇴, 삶의 고뇌, 죽, 인간의 삶이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팔리면 뭉크는 새로운 버전으로 그림을 다시 그려 채워 넣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이 겪은 고통과 괴로움을 예술적 창의성으로 전환시키고 수많은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나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 필요하다. 불안과 질병이 없으면 나는 방향타가 없는 배일 것이다. 나의 예술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내 예술의 일부이다. 것들은 나 자신과 구별될 수 없며, 그것들의 파괴는 나의 예술을 파괴할 것이다. 나는 이 고통들을 유지하고 싶다."
예술은 고통과 환각 속에 괴로운 자기 자신에 대한 피난처였으며, 구원이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말한 것처럼 감상자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인간의 운명을 깨닫고 자아 대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기를 뭉크는 작품을 통해 제안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