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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1581년 11월 16일) 1885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lya Yefimovich Repin) 은 19세기말 러시아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로 문학에서의 '톨스토이'에 비견되곤 합니다. 

 

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에서 하급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당시 최고의 명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과 장학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 당시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보여주어 19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세밀한 표정 묘사로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는 논란의 작품 

2018년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그림을 감상하던 한 남성이 벼랑 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작품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관람객의 근접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금속 안전봉을 뽑아 작품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림을 감싸고 있던 진열 유리는 깨졌고, 유리 파편들이 캔버스에 박히면서 그림은 찢어져 버렸습니다. 경찰에 잡힌 그는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안정을 찾은 후 남긴 진술은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그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 그림은 이와 같은 충동적인 이유로 공격을 받아 몇 차례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그림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입니다.
 
스탕달 신드롬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문학 작품을 보았을 때 작품이 주는 충격과 감동에 압도당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가볍게는 일시적인 흥분에 빠지거나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하고, 심할 경우 호흡 곤란과 환각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 '적과 흑'을 쓴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그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 빠져 있다가 천상의 희열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했다. 모든 것이 살아나 내 영혼의 말을 건넸다."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 훼손된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913년 1월 16일에도 두 인물의 얼굴 부분을 크게 훼손되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리야 레핀이 살아있어 그가 직접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처음 공개한 1885년부터 그림 속 피가 진짜 피가 아니냐는 소문과 함께 끊임없이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레핀이 그린 이 그림은 아름답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섬 한 전율이 느껴집니다. 러시아 역사의 충격적인 한 장면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격하게 밀려 올라간 카펫과 그 위에 내팽겨 쳐진 쇠 지팡이, 뒤로 넘어진 의자와 바닥에 나뒹구는 베개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 피투성이가 된 젊은이와 앙상한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노인 그림은 끔찍한 사건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미 카펫 바닥을 적셔버린 피는 노인의 손가락 사이로 계속 흐르고 있고 두 인물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최초의 황제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이반 차레비치였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공포와 겁에 질린 채 멍한 이반 4세의 표정은 너무나 생생해서 이성과 광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듯합니다. 아들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이반 4세 본인이었습니다.
 
이반 4세는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남다른 정치를 펼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방법은 바로 폭력이었습니다. 이반 4세는 사실 '이반 뇌제'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공포를 뜻하는 러시아어 그로즈니를 번역한 말로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험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인 폭군이자 공포정치로 국가를 단단한 토대 위에 세운 능력 있는 군주였는데 통치 전반기는 오히려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했었습니다. 광기 어린 통치는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1581년 11월 이반 뇌제는 아들의 궁을 방문하였는데 임신 중인 며느리 엘레나를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엘레나의 복장이 황제를 대하는 예우에 벗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반 뇌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임신부인 며느리를 폭행하기까지 합니다. 이 폭행으로 엘레나는 그만 유산을 하고 말았고 아들 이반 왕자는 아버지를 저주합니다. 이에 이반 뇌제는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지팡이로 아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들 이반을 죽이게 됩니다.

 

그림은 아들을 죽이고 난 후 정신을 차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반 뇌제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충격, 후회, 슬픔, 분노, 두려움, 이반 뇌제의 눈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느껴지게 합니다. 이 감정들은 매우 생생해서 보는 이들을 전율케 합니다.
 
이 그림은 일리야 레핀이 사람의 감정을 얼마나 잘 잡아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레핀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걸작이라 평가받습니다.
 
충격과 절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 세상을 다 잃은 듯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손엔 핏줄이 퍼렇게 서 있고 원망스러움이 가득한 아들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 채 마르지 않았습니다. 카펫과 옷, 인물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고, 쇠지팡이 끝에 묻은 피가 참혹한 사건의 증거로 남았습니다.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성격까지 읽을 수 있는 생생한 눈빛과 표정, 몸짓, 주변 배경의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그림이 발표되자마자 나라에는 큰 반향이 일었고, 분노한 알렉산더 3세는 이 그림의 전시를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이 그림은 최초로 검열에 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림 속 모든 요소가 복잡하게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에게 '저주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 

러시아 근대미술의 아버지, 19세기 사회주의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에게 붙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저주의 화가'입니다. 사실 일리아 레핀에게는 이상한 소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 속 모델들은 금세 사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작가 '알렉세이 피셈스키',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로그스키' 등 레핀이 초상화에 그렸던 이들이 모두 초상화를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잇따라 사망했습니다. 위의그림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레핀은 죽은 황세자를 그릴 때 모델로 러시아의 소설가 '프세볼로트 가르신'을 모델로 했습니다. 일리야 레핀이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을 대중에 공개한 지 3년 뒤인 1888년 가르신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렸고 5일 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뜻밖에도 사망한 가르신의 모습은 레핀의 그림 속 아들 이반의 모습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1901년 일리아 레피는 러시아 정부의 의뢰를 받아 니콜라의 2세 왕과 정관계 인사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요.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델이 됐던 대부분 장관들이 화를 입거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일리아 레핀의 저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주의 화가'라는 수식에도 불구하고 일리아 래피는 러시아 온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을 주제로 진정한 러시아 회화에 대해 고민한 그는 러시아만의 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이 그림에는 민중들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관객은 그림에 나타난 고통과 슬픔에 압도당해 광기 어린 충동을 저질렀습니다.

 

레핀의 그림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역사의 흔적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적인 묘사와 예리한 내면의 심리 묘사의 대가로 관람객들을 압도하는 이 그림 앞에서 그의 그림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심리묘사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44;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레핀의 작품은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표정과 눈빛, 배경 묘사가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한 편의 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으로 레핀의 심리 묘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다 유배지에 끌려갔던 아버지가 어느 날 귀환한 순간을 표현한 작품으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한 기쁨과 놀라움이 긴장감 있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 묘사가 돋보입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덥수룩한 수염과 휑한 눈, 홀쭉해진 몸매는 유배지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보여주면서도 얼굴 표정에서는 가족에게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절제되어 표현되어 있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노모는 믿어지지 않는 듯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아노 앞에 여자는 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문을 열어준 하녀로 보이는 여자의 의심 섞인 석연치 않은 표정과 작은 딸로 보이는 여자 아이의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한 낯선 아버지로 인한 두려운 시선이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를 보며 기쁨과 반가움의 미소를 보여주는 아들로 인해 이런 긴장감의 극적 해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배치와 구도, 시선의 주고받음을 절묘하게 표현해 내는 레핀의 솜씨는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벽에 양쪽에 걸린 두 점의 초상화는 각각 '타라스 셰우첸코'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로 차르 체제 하에서 고통받는 농민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두 초상화 가운데 골고다 그림을 그려 넣어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순교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옆의 벽에는 알렉산더 2세의 임종 장면을 그린 그림과 남자가 들어온 순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새로운 밝아질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레핀은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을 세 차례나 바꿀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작품을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과 같은 제목의 그림이 하나 더 있는데 같은 주제의 비슷한 배경으로 작은 사이즈로 그려졌으며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여기서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입니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가 담겨 있는 일리야 레핀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1878년부터 이동파에 참여합니다. 러시아어로 '방랑자'를 뜻하는 이동파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었던 14명의 작가들을 이야기하는데 1870년 이반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주도하여 결성된 이동전시협회로 미술이 인도적이며 사회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공감한 레핀은 이동파에 참여하며, 곧 이동파의 핵심적인 작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러시아 사회에 반발하여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을 위해 이동전시협회를 결성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번역하는 무기였습니다.

 

러시아 중산층이나 농민 생활을 주제로 사실적이고 쉽게 묘사하였으며, 대중들에게 진정한 미술을 보여주기 위해 러시아 곳곳을 순회하며 민중들의 삶 속에 들어가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림은 황제와 귀족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
 

레핀은 예술이 특정 계층의 사람만의 소유가 아니라 동시대 모든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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