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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까지 만들어진 장승업의 인생과 그의 후원자들
'취화선'이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조선시대 가장 자기 멋대로 산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 포스터는 장승업이 화가임에도 그 손에 술병이 쥐어져 있습니다. 술을 미친 듯이 좋아했고, 여색을 즐겼으며, 왕이 그림을 그리라는 명에도 술을 마시고 싶다는 이유로 도망가지을 갈 정도로 매우 술을 좋아했습니다.
제목도 '취화선'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단순히 장승업이 술을 좋아했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조선 중기의 화가 김명국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장승업은 헌종 9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의 대표 화가로 초기에 안견, 후기의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힙니다. 장승업은 대원 장 씨 집안 출신으로 1843년에 태어났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황해도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승업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당시 말로 총각 나이가 되어서 한양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한양의 온 장승업은 '야주개'라는 종이 파는 집에서 일꾼으로 지내게 됩니다. 당시 종이 파는 집은 단순 종이만 파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함께 팔았습니다. 이때 그림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이응헌이라는 문인의 집에 지내게 되면서 장승업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응헌은 '동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응헌의 집에는 중국의 이름난 사람들의 그림과 그 시가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갤러리였습니다. 이때마다 장승업도 어깨너머로 구경하며 배웠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갑자기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려보고자 붓 쥐는 법도 몰랐던 장승업의 손끝에서는 대나무, 매화, 난초, 바위가 탄생했습니다.
이응헌이 이 그림들을 보고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이냐고 묻자 장승업은 본인이 그렸다고 고합니다. 이응헌은 신이 도우는 일이라며 종이와 붓, 먹을 장만해 주고, 장승업이 그림 전념하도록 해주자 후원자의 역할을 해준 것입니다.
이응헌 이외에도 변원규라는 인물도 있는데, 변원규는 고종순족 실록에도 등장하는 유력한 인물로 서화를 수집하던 인물입니다.
시기를 따져보면 이응헌은 장승업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고, 변원규는 장승업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나서 후원을 해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장승업의 실력은 천재성에 노력까지 더해져 일취월장합니다.
장승업의 실력은 금세 유명해졌고, 그림을 청하러 오는 수레와 말이 골목을 메울 정도였습니다. 19세기말 개화기의 인물과 역사를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근대 '신품(神品)'이라고 추앙받고 있어 웬만한 유력자가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 나는 금사 박항래에게서 이 그림을 얻어 간신히 소장에 병풍으로 꾸몄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공교로움과 묘함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필치가 대단히 소방하고 계산하지 않은 듯 가볍게 점철했는데도 자연스러운 가운데 그 운치가 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신품이라고 하는가 보다."
장승업의 유명하고 재치있는 일화들
고종과의 일화 - 장승업의 이름은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고종은 궁의 조용한 방을 마련하라 명하고 장승업을 불러 병풍 십 수첩을 그리라 명합니다. 고종은 장승업이 술에 미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술을 많이 주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하루 두 세 잔만 주도록 했습니다.
당시 화가에게 궁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최고의 대우였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장승업은 '천재'인 동시에 '광인'이라고 불렸던 인물입니다. 장승업에게 돈과 명예는 성공이 아닌 구속이었습니다. 날은 더운데 온몸을 조이는 관복을 입고 있자니 숨이 막히자 열흘은 버텼는데 술 생각이 너무 간절해집니다.
결국 문지기에게 그린 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는 밤중에 도망가 버리자 고종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당장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번에는 경계도 강화시킵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간절했습니다.
금줄 지금으로 치자면 교도소 간수의 옷을 훔쳐 달아납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말입니다. 고종도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화가 났습니다. 포도청에 명해 가두어 버립니다.
꼼짝없이 벌을 받을 처지였는데 벼슬을 하던 민영환이라는 자가 구해줍니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신이 본래 장승업과 친하오니 저희 집에 가두어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라고 청했고, 고종도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허락합니다. 민영환은 장승업을 집으로 데려가 방을 하나 내어줍니다.
그런데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환이 일을 나가고 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술집으로 도망가버립니다. 민영환은 사람들이 시켜 장승업을 잡아오지만 장승업은 계속해서 도망갔습니다. 결국 병풍 십 수첩은 완성하지 못합니다. 장승업에게 세속적인 성공은 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자신을 '오원(吾園)' 이라 칭한 이유 - 부모도 없이 글도 못 배우고 어깨너머로 배운 그림으로 3대 화가의 이름을 올린 사람, 산수, 화조, 영모, 인물, 기명절지화까지 모든 장르 뛰어났던 화가 장승업. 조선의 대표 화가를 말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사원입니다. 사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 세 명을 사원이라고 합니다.
그의 재치 있는 성격은 장승업의 호인 '오원(吾園)'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홍도의 호는 '단원(檀園)', 신윤복의 호는 '혜원(蕙園)'입니다. 이 두 화가 모두 '원(園)'으로 호가 끝납니다.
장승업이 스스로 호를 원이라고 지은 것은 자존심,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문인 화가였던 스승 강세황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신윤복은 궁중화원에서 임금의 초상화를 그렸던 아버지 신한평이 있었죠. 임금의 초상화 어진을 그린다는 것은 그 시대 최고의 화가이자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원(吾園)'이라는 장승업의 호를 풀어보면 '오(吾)'자가 바로 '나'라는 뜻이기 때문에 '나도 원이다'라는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 당시에도 레전드로 볼 수 있는 김홍도 신윤복과 자신이 동급이라고 자칭한 것입니다.
<풍진삼협도(風塵三俠圖)>에 얽힌 일화 - 위의 그림 <풍진삼협도(風塵三俠圖)>를 보면 어딘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제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을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풍진삼협(風塵三俠)' 어지러운 세상의 세 협객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는 두 명의 협객 밖에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에겐 조석진과 안중식이라는 제자도 생겼습니다. 사실상 제자라기보다는 조석진, 안중식이 쫓아다닌 것입니다. 장승업의 제자도 그게 궁금했는지 스승인 그에게 나머지 협객 한 명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장승업은 이렇게 대답하죠. "한 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저 산 뒤에 오고 있어."라고 말입니다. 중국 소설 「규염객전(虯髥客傳)」 속 이야기에 본인만의 재치를 넣어 작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장승업의 작품 <호취도>, <삼인문년도> 에 대한 해석
조용한 붓질 속에 강렬한 에너지, 억센 발톱과 날카로운 부리, 살기 등등한 매서운 눈빛, 심하게 뒤틀린 위태로움과 동시에 살아있는 듯한 나뭇가지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체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생생함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기울어가는 조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매는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을 의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오원 장승업의 <호취도>입니다. 서로 눈길을 교환하는 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팽팽합니다. 한바탕 결전을 치르기 전 숨을 고르는 묘한 긴장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독수리들이 앉아 있는 나무는 기이하게 묘사했습니다.
단숨에 세로로 죽 그어내린 고목의 기둥에서 장승업의 대담한 붓질이 느껴집니다. 찍고, 긋고, 뻗치기를 반복한 가지는 제멋대로 꺾여 있어 화면에 변화를 주고 오히려 멋을 더합니다.
대담하게 그려진 나무와는 대조적으로 바위 사이의 갈대와 꽃, 나무의 잎사귀는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 위쪽에 시는 조선 말기의 서화가 정학교가 썼습니다. "넓은 땅, 높은 산은 의기를 더해주고, 해묵은 나무와 풀포기는 정신을 늘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우측의 그림 <삼인문년도>는 중국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수록된 내용으로 세 명의 노인이 서로 자기 나이가 훨씬 많다며 나이 자랑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장승업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인물 산수화를 그렸습니다.
그림 맨 아래쪽 왼쪽의 노인이 말합니다. "내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천지를 만든 반고(鎜古)와 어렸을때 친하게 지낸 기억이 난다네." 그러면서 노인은 하늘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가운데 있는 노인이 말합니다.
"바다가 뽕밭으로 변할 때마다(상전벽해,桑田碧海) 그 숫자를 세려고 나뭇가지를 놓았는데 지금은 그 나뭇가지가 열 칸 집을 가득 채웠다네."
가운데에 있는 노인이 그림 위쪽의 바다와 그 옆에 자리한 집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쪽에 세 번째 노인이 바로 옆에 복숭아나무를 가리키며 하는 말입니다.
"난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에 버렸는데 지금은 그 씨가 곤륜산 높이만큼 쌓였다네."
그림 오른쪽에 파란 옷을 입은 소년은 한 번 먹으면 천갑자를 사는 복숭아를 세 번이나 먹어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방삭(東方朔)입니다.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동방삭의 표정에서 아무 의미 없는 나의 대결을 펼치고 있는 세 명의 노인에 대한 해학이 엿보입니다.
그림 왼쪽 위에는 1914년에 장승업의 제자 안중식이 쓴 글이 있습니다.
"이는 장오원 선생이 중년에 그린 것이다. 인물과 나무 바위의 필법과 채색은 신운이 생동한다고 할 만하다. 그 평생 그린 인물이 적지 않지만 이 폭과 같은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보배라 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8년이 되었다. 이제 이 그림에 글을 쓰다가 술잔을 기울이며 휘호 하시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신운이 생동한다는 말에서 강렬한 필치로 그린 신비로운 작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장승업의 그림에는 대부분 시가 없습니다. 그는 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림만으로도 그는 당대의 대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의 정신보다는 기교에만 치중하고 지나치게 중국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렬한 힘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장승업의 그림은 그가 왜 조선시대의 천재 화가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897년 그의 나이 55세에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습니다. 장승업 죽음의 전말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장승업은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뜬구름 같으니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숨어버림이 좋을 것이다.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장사를 지낸다 하며 떠들 필요가 무어냐" 이 세상 무엇 하나에도 심지어 죽음에서까지도 구속되고 싶지 않은 듯한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는 말 같습니다.
술 없이는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