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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
첫 번째, 윤두서의 자화상에 몸과 귀가 안 보이는 이유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강렬한 눈매와 구레나룻. 한 올 한 올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콧수염과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풍성한 턱수염. 한국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목도 없고 몸체도 없고 얼굴과 수염만 있을 뿐 귀는 보이지 않습니다.
18세기 선비화가 윤두서는 그의 자화상에 숱한 비밀을 남겨두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낸 인물의 삶의 표정을 담은 것이 초상화입니다. 자화상도 초상화의 일종입니다. 사진이 없었던 조선시대 사당이나 서원에 봉안할 목적으로 사대부라면 누구나 이런 초상화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초상화는 전신상이거나 상반신을 그린 반신상 위주입니다. 그런데 윤 두서의 자화상은 얼굴만 보이는 매우 독특한 모습입니다. 마치 허공에 얼굴만 떠있는 듯한 파격적인 모습입니다. 수염은 살아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그렸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귀와 목은 왜 없는 걸까요?
조선시대 사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떼어낸 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교 윤리나 미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더구나 윤두선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왜 증조부가 되는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조선 사료 집진」에 있는 1937년에 촬영한 윤두서 자화상의 옛 사진에는 윤두서 자화상에선 보이지 않던 도포 깃과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옷주름선이 분명히 찍혀 있습니다. 그럼 상반신 윤곽선이 왜 감쪽같이 사라진 걸까?
조선 사료 집진: 조선시대 중요한 문서들 자료, 역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의 도판을 수록이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휘로 펴낸 조선의 유물 유적에 관한 조사 보고서다. 도판의 종류로는 기록과 고문서, 사적 등이 주로 포함되어 있으며 필적과 화상 등도 실려 있다.
가로 20.5센티미터, 세로 38.5센티미터 크기의 <윤두서의 자화상> 진본이 보관된 곳은 '녹우당'입니다. 숨겨진 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적외선 촬영입니다.
탄소는 적외선을 잘 흡수해서 적외선 촬영을 하면 먹이나 유탄으로 그린 그림의 선과 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자화상의 모습에선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도포에 주름 잡힌 모습까지 그려진 상반신이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분명하게 존재하는 몸체의 윤곽선이 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그것은 우리나라의 옛 초상화법, 혹은 그림 그리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림은 그림을 앞면에서만 그리는 게 아니고 뒷면을 같이 사용했습니다. 종이나 비단은 반투명하기 때문에 초상화의 피부표현등은 앞에서 칠하면 부자연스럽기 쉬운데 뒤에서 호분이나 핑크빛을 바르면 앞에서는 은은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탕건에 주름과 농담 변화가 있는 부분부터 머리카락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탕건의 좌우 끝부분에서 아래쪽 구레나룻 사이로 귓바퀴도 그려져 있습니다.
유탄으로 초안을 그린 뒤 옷선은 뒷면에서 다시 먹선을 입힌 다음 얼굴과 도포에 채색도 했다는 것입니다. 윤두서는 화폭의 앞뒷면을 이용한 그림 기법이 파격적인 모습의 명작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는 왜 수염을 과장 되게 그렸을까?
그의 구레나룻은 이처럼 사자의 갈기처럼 뻗어 있습니다. 그의 턱수염 또한 대단히 독특하게 생겼습니다. 이처럼 양갈래로 뻗어 있는 턱수염은 우리 주변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윤두서는 이처럼 자화상의 수염을 매우 과장해서 그렸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윤두서에게 수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초상화의 사실적인 표현을 누구보다 중시한 윤두서였기에 의문은 더욱 커집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 반드시 대상을 관찰한 뒤에야 붓을 들었다고 전해올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던 '남태응'도 감탄할 정도로 사실성을 추구한 윤두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그린 윤두서의 자화상 속 수염은 그가 추구한 사실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구레나룻 수염 속에 숨겨둔 윤두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왜곡이 전체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게 되는 왜곡이라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속에서 왜곡이라면, 그 왜곡이 더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사람의 정신으로서 드러내는데 아주 중요하다면 그 왜곡은 사실성이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가 됩니다. 윤두선은 필력을 다해 수염을 그렸고, 구레나룻 왜곡을 통해 내면에 품고 있던 기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신선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 이하곤 「윤호언자사소진찬」
그의 수염은 도대체 무엇으로 그렸을까요? 0.5mm 이하의 굵기로 무성한 수염 가닥을 그리려면 극세밀화에 적합한 붓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가는 붓도 먹물이 말라 자화상의 긴 수염을 그리기엔 역부족합니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극세밀화를 그릴 때 사용한 최고의 붓은 쥐수염으로 만든 붓을 사용했습니다. 쥐수염 붓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강해 힘도 좋고 먹물도 오래 머금는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60cm에 이르는 가늘고 긴 수염 가닥도 끊어지지 않고 한 번에 균일하게 그려집니다. 코털 한 올, 수염 한 가닥 한 가닥을 이처럼 세밀하게 표현한 윤두사라면 쥐수염 붓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윤두서의 자화상은 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가?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시대를 그려냅니다. 특히 투철한 자아의식 없이는 화가라도 그리기 힘든 것이 바로 자화상입니다. 더구나 윤두서의 자화상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이라면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 서양화에도 혁신적인 자화상이 등장합니다. 그 주인공은 렘브란트입니다. 그는 7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는 흥미롭게도 자화상마다 표정이 모두 다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변화하는 감정과 심리 상태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렘브란트 역시 윤두서처럼 권위와 신분을 드러내던 기존의 초상화 양식에서 탈피해 자아의식을 담은 파격적인 자화상을 선보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윤두서의 초상화와 확실히 다른 점은 렘브란트의 모든 자화상은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측면상입니다. 인물의 정면상은 입체감을 살리기가 힘들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면상으로 그린 것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과연 윤두선은 왜 무엇 때문에 정면상을 선택하게 된 걸까요?
'녹우당'에는 삼백 년 동안 전해온 백동 거울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의 녹이 슨 이 백동 거울이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것입니다. 윤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자화상을 그렸을 것입니다. 나의 삶은 외롭고 힘들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도도함, 당당함 등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네 번째, 그의 머리 위 탕건은 왜 잘려있을까?
윤두서 자화상이 주는 또 하나의 큰 충격은 머리 윗부분을 잘라낸 겁니다. 그 윤두서의 자화상이 잘린 부분은 관모를 쓰는 부분입니다. 당대 선비 문인들이 어떤 인생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탕건은 '감투'라고 불리기도 하며 '관직'을 상징합니다.
윤두서 또한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윤두서가 공직활동을 하던 18세기 조선 역사상 가장 당쟁이 심했다고 여겨지는 숙종시기였습니다.
'이영창 역모사건' 1697년 서자 이영창이 역모를 꾀했다고 알려진 사건인데 윤두서 형제들이 가담했다고 알려졌지만 모두 무고였습니다. 이로 인해 윤두서의 가족은 거제도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고 윤두서의 셋째 형은 조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받던 중 죽었습니다. 당쟁의 벽으로 현실에 부딪힌 윤두서는 급기하 관직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지로 합니다.
"풀은 길고 영지는 빼어나 깊은 산 색다른 봄이네. 중원은 비바람 치는 밤이니 이곳에 몸 숨김이 좋으리."
- 윤두서 「심산지록도」
극심한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비록 관직 생활은 멀어졌지만 그는 선비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딛고 일어나기까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쳤을 윤두서의 엄격함이 그 자화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겁니다.
다섯째, 윤두서의 그림에 환호한 까닭은?
'선비 화가'들은 그림을 업으로 하지 않고 절대 원칙적으로는 그림을 팔지 않았습니다. 윤두서의 그림은 굉장히 귀했다고 하고, 윤두서는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은 그림을 절대 넘겨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두서의 그림을 조그마한 그림이라도 얻으면 보배처럼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뜻밖에도 윤두서 그림의 열렬한 애호가들은 중인층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에 그토록 환호한 까닭은 무얼까요? 위 그림 속에 답이 있습니다.
두 여인이 나물 캐는 모습을 그린 윤두서의 이 작품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풍속화입니다. 윤두서 작품의 주인공은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그렸습니다. 17세기까지의 인물화는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보다는 역사나 고사에서 유래된 고사인물화 계통이 그려지고 감상되었습니다. 그런 점으로 볼 때는 굉장히 획기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사대부의 사회였습니다. 양반 사대부 위주로 사회가 운영이 되고 하층민들은 거의 역사에 전면에 나올 수 없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부상시킨 윤두서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현실 인식의 반영이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윤두서의 작품은 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윤두서의 그림을 수집하는 마니아층이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해남의 백포만이 일대엔 당시 윤두서가 개관한 넓은 간척지가 있습니다. 심한 기근이든 1733년 기아에 허덕이는 농부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척지를 만들어 정착하게 만든 곳입니다. 윤두서에게 민생을 돌보는 것은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노비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양반들이 노비를 재물로만 취급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걱정했습니다. 윤두서는 자식들에게 노비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할까요? 한 개인적인 삶에 한정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또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하고자 하는 성실함과 진지함 같은 것이 현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