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렘브란트의 성공과 명성, 부와 결혼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 ~ 1669)은 네덜란드 화가이자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태어난 렘브란트의 작품은 경제적 번영, 문화적 발전, 번창하는 예술적 성취로 유명한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살았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렘브란트는 자신을 후원해 주고 격려해 주는 미술상을 만나면서 조금씩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렘브란트를 한 번에 유명 화가로 끌어올려준 작품이 있는데, <툴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이라는 초상화 의뢰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해부학 강의실을 표현한 작품으로 스틸프 의학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시체를 활용해서 해부학 수업을 하고 있는 이 교수와 그 수업을 듣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사실 이 툴프 교수 자체는 유명한 외과의사였고, 그 외에 주변에 그려진 인물들은 유명인들이긴 했지만 사실 의사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근데 마치 의사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해부학 수업이라는 주제 자체는 이 렘브란트가 살아있던 시기 100년 전부터 이어져왔던 굉장히 전통성이 있는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 이전 같은 경우에는 동일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굉장히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을 표현했다면, 렘브란트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이 사람들이 해부학 강의에 참여해서 이 수업을 정말 열정적으로 듣고 있는 듯한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서 시체를 깊숙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그런 인물들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렘브란트는 즉각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기 시작한 렘브란트가 레바르덴 시장의 딸이었던 사스키아를 소개받게 되면서 결국 결혼에 성공을 하게 되었고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받아서 결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게 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대저택을 사들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명분하에 다양한 작품들 그리고 소품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비싼 예복과 그리고 소품으로서의 무기들, 모델들을 위한 의상들, 비단 판화 그림들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사들였다고 하고요.

 

큰 저택 안에서 1층은 주거용으로 그리고 2층은 이 렘브란트의 작업실, 나머지 방들은 렘브란트가 모았던 수많은 수집품들과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뜰리에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스키아와의 결혼 이후에 총 4명의 아이를 가졌고 낳았지만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다행히 막내아들이었던 '티투스' 같은 경우에는 성인으로 자라나게 되지만 부인이었던 사스키아 역시나 30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스키아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데,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자신의 아들 '티투스'와 그리고 렘브란트에게 남기게 되는데, 이 재산 같은 경우에는 렘브란트가 재혼을 할 시 모든 유산을 잃게끔 작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소송과 벌금과 위자료, 과도한 소비와 낭비벽과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서 점차 빚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를 몰락의 길로 이끈 작품 <야간순찰>의 뜻밖에 알게 된 사실 

반닝 코므 대장의 민병대&#44; 렘브란트
<반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1642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가장 잘 나가던 시기에 의뢰받았던 그림이 바로 <야간 순찰대>였습니다. 이 그림의 원제는 <프란스 반닝코크 대장의 민병대>이고 집단 초상화입니다. 제목 그대로 민병대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총 16명이 100 길더씩의 돈을 모아서 그림을 의뢰한 1600 길더짜리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의 크기도 매우 큰 대작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민병대는 평상시에는 생업에 전념하다가 국가에 큰일이 생기면 전투에 참가해서 국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병대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고 실제로 사회적으로 매우 힘이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자신들의 집단 그림을 상당히 많이 의뢰했는데 현재도 이 같은 민병대의 단체 초상화가 대략 57점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대작을 암스테르담에서 제일 잘 나가는 화가 렘브란트에게 의뢰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야간 순찰대>는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큼 그림의 예술성 역시 정말 뛰어납니다. 인물 모두가 살아 숨 쉬는 듯 활동적으로 보입니다. 외국에서 국빈이 와서 환영하기 위한 퍼레이드로 나가기 위해 부대원들이 모두 분주히 준비하는 바로 그 순간을 담은 그림입니다.

 

깃발을 꺼내고 머스크 총을 만지거나 북을 치고 있는 등 소란스러운 모습입니다. 무기나 갑옷 역시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이 보이게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사실은 낮 그림입니다. 

 

1975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한 남성이 그림을 난도질해 버렸습니다. 칼은 12번이나 캔버스를 뚫었고, 그중에는 50cm 정도의 긴 상처도 생겼습니다. 작품이 완성된 지 300년이 지나 발생한 훼손은 크나 큰 수난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불가피해졌습니다.

 

때문에 전문가들이 모여 이 작품 복원을 시작했는데 복원 과정 중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사실 야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품을 복원하면서 적외선, 현미경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했는데, 이 작품은 사실 밤이 아닌 한낮에 펼쳐진 민병의 출격 장면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야경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은 만들어진 지 1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군대나 경찰이 야간 순찰을 하던 18세기에 이르러 어둡게 변한 그림을 보고 추측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림이 검게 변한 이유는 다름 아닌 물감 때문이었습니다. 실버 화이트 렘브란트는 연백이라고도 부르는 이 백색 물감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물감에는 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렘브란트는 다른 화가들보다 납이 들어간 물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화학반응으로 인해 명암의 대비가 본래보다 더 극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복원을 해야 했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작품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졌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선 사실 초상화가 유행했습니다. 당시 단체 초상화는 마치 오늘날의 졸업 사진 같았습니다. 반닝 코크 대장과 그가 이끄는 17명의 민병대원들도 자신들의 위용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고 민병대는 노발대발에 화를 내며 돈을 줄 수 없다 말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가 기존 초상화와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집단 초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빛을 받아 모습이 훤히 드러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어둠 속에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대원은 얼굴이 부분적으로 잘리는 등 각 개인이 아주 불공평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렘브란트가 활용한 명암법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렘브란트가 그린 민병대 그림 야간 순찰대는 당시 일반적인 그림의 모습과는 정말 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낸 사람들이 그렇게 잘 부각되게 그려진 건 아니라는 겁니다.

 

좋게 보면 한 명 한 명이 개성이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이렇게 보면 오합지졸의 군대로 보일 여지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네덜란드를 지키고 있던 강력한 그룹이었던 민병대들로부터 렘브란트는 점점 악평을 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도 렘브란트는 자신만의 작품성을 고집하면서 점차 대중의 취향과 멀어지게 됐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최고의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명성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그림 의뢰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야간 순찰대>라는 그림을 발표한 이후 그의 인생이 180도 확 달라지게 된 겁니다. 화가로서의 평판이 점점 좋지 않았던 렘브란트, 줄어드는 작품에 떨어지는 그림 가격 전부 그를 궁핍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가장 잘 나가던 화가 렘브란트는 1656년에 개인 파산을 신청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투자까지 실패해 버립니다. 개인 파산 이후 일종의 신용불량자가 된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는 족족 압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을 꾸준히 남깁니다.

 

 자화상만 70여 점 자기애가 강한 화가였을까? 

렘브란트 자화상
34세와 노년의 렘브란트 자화상

 

렘브란트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노년 시절까지 그가 남긴 자화상은 무려 70여 점에 달합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자화상에 집착했던 걸까요? 곳곳에 칠이 벗겨진 벽과 금이 간 바닥, 방을 장식하는 가구들조차 별로 보이지 않는 허름한 공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왼쪽은 꼿꼿한 자세로 당당한 모습의 34살의 렘브란트입니다. 그에 반해 오른쪽 초상화는 팔레트와 붓다발의 쥔 손이 그의 결연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오른쪽)>이 다소 관조적인 자세로 우리를 응시하는 것과 달리 청년 시절의 자화상을 보면 패기와 에너지가 넘칩니다. 헝클어진 머리, 듬성듬성 난 수염, 반쯤 벌어진 입술은 렘브란트의 성격을 짐작케 합니다. 렘브란트는 한 인간의 내면이 찰나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반복해 그리며 인간의 표정이 감정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에게 빛의 화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독특한 명함 기법도 이때 확립되었습니다.

 

45도 위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 콧날을 기준으로 좌우가 명함 대비를 이루고, 그림자가 진 쪽 눈 밑에는 역삼각형이 생깁니다. 이는 얼굴에 입체감을 주어 인물을 돋보이게 합니다. 때문에 이 역삼각형은 이후에 렘브란트 작품에서 심지어 2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에서도 반복해서 발견됩니다.

 

렘브란트는 빛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인간의 표정, 나아가 내면을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빛과 표정을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기량을 뽐냈던 렘브란트는 파산 이후 본인에게 들어오는 초상화 주문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려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릴 모델이 자기 자신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이제 그는 자신의 처진 살과 주름을 여과 없이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오른쪽)>은 빛과 어둠의 뚜렷한 경계를 오갔던 렘브란트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 기록입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옷과 꼿꼿한 자세, 팔레트와 붓다발을 움켜쥔 손은 젊은 렘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섬세하게 그려진 얼굴과 달리 그의 몸은 어둠에 먹혀 흐릿해 보입니다. 거친 붓터치로 그려졌을 뿐 정교함이나 세밀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얼굴만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얼굴로 왔다가 얼굴로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듯 렘브란트의 얼굴은 긴장을 풀고 평온해 보입니다.

 

자신을 할퀴고 지나간 인생을 탓하지도, 화려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지도 않으며, 담담히 남은 삶을 견뎌냈던 렘브란트. 그의 내밀한 영혼이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이 그림은 이토록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아래 관련 글을 참조하여 보세요.

 

렘브란트 반 레인의 성화, 성서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

렘브란트 반 레인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판화가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여겨집니다. 빛과

aster6108.com

 

반응형